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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 공개

 

 

 진선조의 아침은 목검을 쥐고 훈련에 임하는 대원들의 힘찬 기합 소리와 그들을 반겨줄 따뜻한 음식 냄새로부터 시작하곤 했다. 일찍부터 식당에서 요리를 돕고 있던 두두는 조리실의 창문을 넘어 들려오는 장정들의 일사불란한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요 몇 개월 간 귀에 익혀둔 저마다의 목소리가 합쳐진 듯 미묘하게 분리되어 하나씩 주인을 일깨워주었다. 아, 오늘 지도는 오키타구나. 국장님은 안 계시나? 사사키 씨, 열심이네. 샐러드용 야채를 써는 손길이 어느 순간 멈춰있었다.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는 우렁찬 소리에는 소녀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무언가가 담겨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두두야, 서두르지 않으면 식사 시간에 늦고 말거야.”

“아차, 죄송해요!”

 커다란 냄비를 휘젓던 아주머니의 지적에 화들짝 놀란 두두는 얼른 칼을 고쳐 잡았다. 두두가 천인이라고는 하지만 진선조의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에겐 딸아이 뻘의 나이였기에 그녀들은 당황하는 소녀를 보고 씩 웃으며 짓궂은 놀림을 한 마디씩 던지기 시작했다. 경찰 나리들 중에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어? 아, 이 사람아, 두두 나이를 생각해봐. 청춘이지, 청춘. 그럼, 그럼. 누구야? 말만 해. 이 아줌마가 척 이어줄게.

“그, 그런 거 아니에요.”

 목덜미에서 가볍게 묶은 고운 연둣빛 머리카락 아래로 살짝 달아오른 얼굴이 비쳤다. 아주머니들의 웃음소리를 애써 흘려 넘기며, 두두는 며칠 째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렸다. 또 멀리 나간 걸까, 자키 오빠는. 오늘도 남을 것이 분명한 일인분의 식사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분주하던 아침 이후, 정오가 지날 무렵에는 두두에게도 크게 할 일이 없었다. 더욱이 오늘은 심부름을 시키는 사람도 없어서, 두두는 다다미 바닥에 얇은 이불을 한 장 깔고 엎드려 지난주에 사 온 동인 작가의 소설책을 펼쳐들었다. 그러나 그토록 기다리던 클라이맥스 부분의 전개임에도 글자가 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삼십분 째 같은 페이지만 들여다보고 있던 두두는 결국 책을 덮고 벌떡 일어났다.

“부장님은 알고 계시겠지? 물어볼까? 귀찮게 군다고 화내시지 않으려나…….”

 그녀는 당장 방을 박차고 나가려 일어섰다가도 문 앞을 서성이며 고민했다. 자키 오빠는 감찰이니까 어쩌면 기밀 임무를 나간 걸지도 몰라. 그걸 물어보는 건 엄청난 실례가 아닐까? 아냐, 그냥 물어보는 건데, 뭐.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는 거고. 오빠는 보통 엉뚱하고 쓸데없는 일에 투입되곤 하니까. 고민이 길어질수록 서성이던 발이 빨라졌다. 결국 그 끝없는 갈등은 두두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지면서 끝을 맺었다.

“아우, 아파라…….”

 넘어지면서 바닥에 부딪힌 무릎을 문지르며 일어난 두두는 결국 살금살금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나무로 된 마루가 삐걱거리지 않도록 뒤꿈치를 들고 도둑고양이처럼 걸어가던 그녀는 곧 히지카타가 집무를 보는 곳에 도착했다. 그녀의 방에서 멀지 않았기에 도착이야 금방이었지만 또 하나의 문제라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에 있었다. 일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야마자키의 행방을 물으려면 그를 불러야 한다. 어쩌지? 두두는 또 한 번 문 앞에 우뚝 서

버리고 말았다.

 히지카타는 붓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애써 종이에 시선을 내리꽂았다. 자꾸만 일렁이는 자그마한 그림자 하나가 그의 집중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의 방은 문이 남향으로 나 있어서 햇살이 풍부하게 들어오는 밝은 곳이었다. 그렇기에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지금, 나름대로 기척을 죽이고자 하는 소녀의 행적은 그림자가 되어 히지카타에게 모조리 전해지고 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는지, 두두는 연신 서성이며 히지카타의 시신경을 농락했다. 결국 그는 붓을 내던지고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어이, 아까부터 뭐하는 거야!”

“꺄악!”

“…….”

 화를 낼 생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던 히지카타는 한 손으로 문을 붙잡은 채 허탈한 얼굴로 두두를 바라보았다. 덩치도 조그만 녀석이 반사적인 행동은 얼마나 빠른지, 옆에 있던 기둥을 끌어안고 찰싹 달라붙어 반쯤 숨어버린 탓이다. 히지카타는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쉬었다. 두두가 제 근처를 기웃거리는 까닭이야 묻지 않아도 훤했다.

 

 

 둔영을 나서는 두두의 걸음이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 입가엔 자기도 모르는 새 옅은 미소까지 번져 있었다. 점심을 거르고 도넛으로 군것질을 하며 방에서 나오던 오키타의 눈에 비친 모습은 나풀거리며 멀어지는 연두색 머리카락뿐이었다.

히지카타가 가르쳐 준 신사는 둔영에서도, 가부키쵸에서도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걸어가지 못할 정도로 멀지는 않았다. 신사로 향하는 산길을 다듬어 만든 돌계단도 제법 평탄했다. 자키 오빠가 정말로 이런 곳에 있는 걸까? 두두는 계단을 오르는 내내 주위를 둘러보았지 만 살랑대는 녹음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하아, 겨우 이거 올라오는 것도 힘드네.”

 마지막 계단을 딛고 올라선 후에야 찬찬히 숨을 고른 두두는 조용한 신사로 다가갔다.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진 듯 종각에는 뽀얀 먼지도 앉아있었다. 아무도 참배를 오지 않게 되어버리면 신은 사라져 버린다고 하던가? 주머니를 뒤적이자 초콜릿 하나와 백 엔짜리 동전이 몇 개 나왔다. 제단에 초콜릿과 동전을 올려놓고 뒤로 물러난 두두는 손뼉을 두 번 치고 고개를 숙였다. 신님, 무사히 모두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세요. 소리 없이 기도를 드리는 소녀의 표정이 사뭇 간절했다.

 

 야마자키는 오랫동안 좁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다리를 조심스레 쭉 폈다. 피가 통하지 않아 저릿한 종아리를 주무르며 한숨을 푹 내쉬는 그의 주위엔 단팥빵 봉지와 우유팩 몇 개만 뒹굴고 있었다. 놈들은 대체 언제 나타나는 거야. 벌써 며칠 째인지 아냐고, 정말. 중얼거림을 삼키며 다시 작은 틈새로 눈을 들이민 그의 시야에 언뜻 흩날리는 연두색 머리카락이 비쳤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좀 들어봐도 될까, 아가씨?”

 한쪽 눈가에 길게 찢긴 흉터를 가진 남자가 두두의 등 뒤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기도를 하던 그대로 고개만 돌려 뒤를 돌아본 그녀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깨닫지 못한 듯 눈만 깜빡였다.

비록 부상자도 있었고 행색은 남루했지만 그들은 저마다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예리한 경계를 담고 노려보는 수십 개의 눈동자 앞에서 두두는 자그마한 입술을 벌린 채 얼어붙고 말았다. 지구의 사정에는 어둡다. 눈앞의 이들에 대해서는 더욱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위기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둔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할까요, 대장?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계집애 같은데.”

“흠, 속단은 이르다. 아무도 찾지 않는 신사에 올라온 것도 그렇고, 잡아두고 보면 뭔가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지.”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수염이 거칠게 돋은 턱을 쓸며 두두를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인질로서의 가치를 셈하는 듯 한참을 그렇게 고민하던 남자는 드디어 결정을 내렸는지, 제 등 뒤에 서 있던 부하들에게 손짓을 했다. 잡아, 남자가 뱉은 말은 그 한 마디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겁에 질린 소녀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많지 않았다. 두두는 여기저기에서 뻗어오는 손을 피해 두 눈을 꼭 감았고,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잡아 휙 당겼다. 당연하게도 균형을 잃은 몸은 휘청거리며 뒤로 쓰러졌지만, 곧이어 그녀가 조우한 것은 단단한 돌바닥이 아니라 낯설지 않은 품이었다.

“여기까진 왜 온 거예요? 위험하게.”

두두에게만 들릴법한 작은 목소리였다. 그리고는 미처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를 자신의 등 뒤로 끌어당기며 칼집을 바투 쥐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였다. 진선조의 감찰대원, 야마자키 사가루.

 

 

* * *

 

“놓칠까보냐!”

 가장 앞장서서 뛰어든 자그마한 체구의 남자가 팔랑이는 망토를 잡아채려 힘껏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야마자키의 발이 계단의 마지막 칸을 디뎠고, 그는 두두의 등을 떠밀어 계단 아래로 보내며 왼손에 꽉 쥐고 있던 검의 손잡이를 오른손으로 움켜쥐었다. 비틀거리기는 했으나 넘어지는 일 없이 평평한 땅에 내려선 두두는 다급히 고개를 돌려 자신과 괴한의 사이를 가로막은 야마자키의 모습을 찾았다.

 발도. 빠른 속도로 검을 뽑아 선제공격을 행함을 이르는 말. 두두는 야마자키의 발도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대개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다만, 지금 이 순간에는, 이러한 순간이라면. 검이 뽑히는 그 찰나의 시간에 굉장히 많은 프레임이 흘러갔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제법 무게가 실려 있었다. 두두는 입을 살짝 벌린 채 괴한을 날려버리는 야마자키의 ‘검’을 바라보았다. 군더더기 없는 궤적과 노린 곳을 정확히 가격하는 정밀성은 그의 섬세한 실력을 입증해주는 훌륭한 반증이 되어주었지만, 문제는 도저히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그 ‘검’에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배드민턴 라켓이 칼집에 들어가는 거야!”

“일단은 계속 뛰어요! 가!”

 야마자키가 뽑은 것은 날이 선 검이 아니었다. 늘 손에서 떼어놓지 않던 그의 배드민턴 라켓이 마치 봉인이라도 한 듯 얌전히 칼집에서 잠자고 있던 것이다. 셔틀콕을 때리던 라켓에 얼굴을 내어준 괴한은 그 힘에 떠밀려 안면에 난잡한 무늬를 새긴 채 뒤에서 달려오던 동료들에게 날아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달리는 발길에 박차를 가한 덕분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다른 이들의 기척이 없는 오솔길에서 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죽는 줄 알았네…….”

두두는 긴장이 풀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끌고 커다란 나무의 그늘로 들어갔다. 오후의 햇살이 나뭇잎 사이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 위로 빛의 미립자를 흩어놓았다. 야마자키는 깔끔한 동작으로 배드민턴 라켓을 다시 칼집에 꽂아 넣으며 두두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잠시간 숨을 고르는 소리만 귓가를 간질였다.

“두두씨, 저기, 다치진 않았어요?”

“아, 응. 오빠는요?”

“저, 저도 괜찮아요. 무사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고 뛰었으면서. 두두는 어정쩡하게 허둥대는 야마자키의 손을 보며 속마음을 꾸욱 눌러 삼켰다.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내리자 달려오는 동안 흙이 묻어 지저분해진 구두가 보였다. 나오기 전에 깨끗하게 닦아서 반짝이던 구두였는데. 괜히 속상한 마음에 두두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구두코를 닦기 시작했다. 핀으로 찔러 귀 뒤로 넘겼던 머리카락이 숙인 상체와 어깨를 타고 스르륵 흘러내렸다.

 이전만큼 깨끗하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말끔해진 구두를 확인하고 다시 고개를 들자 머리카락 사이로 무언가가 톡 떨어졌다. 순간적으로 쭈삣 소름이 돋아 깜짝 놀란 두두가 - 혹시 벌레라도 떨어진 건 아닐까 - 아래를 내려다보려는 찰나, 야마자키의 손이 한 발 먼저 바닥을 짚었다. 그가 연한 풀잎 무더기를 헤치고 집어든 것은 두두의 머리에 늘 꽂혀있던 장미꽃 모양의 머리핀이었다.

“풀잎 색이 두두씨 머리색과 똑같아서 이렇게 둬도 예쁘긴 하지만…….”

 야마자키의 손이 조심스레 흐트러진 두두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가르마를 따라 앞머리를 넘겨 핀을 꽂아주는 손길도 섬세하고 다정했다. 손을 떨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긴장한 표정이긴 했지만, 허둥지둥 달려오며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는 그의 손길 아래서 평소처럼 단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역시 두두씨에게 가장 잘 어울려요.”

 

 

* * *

 

돌아가는 길에는 보슬비가 내렸다. 간식거리를 가득 담은 봉투를 사이좋게 나눠 들고 둔영으로 향하던 두 사람은 빗방울이 날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똑같이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오늘은 잔뜩 뛰기만 하네요.”

“어쩔 수 없지, 뭐. 젖기 전에 얼른 돌아가요!”

“잠깐만요-”

서둘러 달려가려는 두두를 붙잡은 야마자키가 손에 들고 있던 봉투마저 내려놓았다. 그리곤 겉에 입고 있던 제복의 상의를 벗어 그녀의 머리와 어깨 위로 씌워주었다. 이렇게 하면 조금 덜 젖지 않을까, 싶어서. 멋쩍게 웃으며 다시 봉투를 집어든 그가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자, 돌아가요. 두두의 눈가가 미소로 곱게 이지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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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M_Ro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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